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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G OC/.ssul

달 0219

녹슨 쇠냄새가 짙게 배인 벌건 인영과 군체 사이를 헤치며 모래인지 자갈인지 모를 땅에 통신용 탐침을 박아 넣는다. 개척자, 모험가, 방랑자. 그런 낭만적인 단어로 대표되곤 하는 헌터. 그러나 선봉대 소속의 헌터가 하는 일은 이런 일들이다. 보물이 가득 든 상자를 독차지할 일도, 좋은 무기를 빼앗을 일도 없는, 시키는 대로의 일을 반복할 뿐인 고요하고 지루한 작업….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도 없고 바라는 것 만을 위해 걸을 수도 없는 헌터는 진정 헌터라고 부를 수 있나…. 다 질린 일을 당장이라도 버려 놓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꼭 닫기 위해 괜히 무게를 잡고 혼자 청승을 떤다. 심어 놓은 탐침 주변으로 흙을 덮어 올리는 일에도 그런 기색이 노골적으로 묻어난다. 발로 깨작대지 말고 제대로 하라는 화력팀원의 잔소리를 대충 흘러 넘기며 땅에 발을 몇 번 구르면 청승맞던 독백에 짜증이 섞인다. 하…. 사일록만 아니었어도 선봉대와는 한 끝도 얽히지 않았을 텐데… 



오랜 정찰임무 끝에 맞이한 사일록과의 재회는 마치 하나의 꿈과 같았다. 많은 찬사와 노골적인 구애, 애정 표현에도, “그건 정확히 무슨 뜻인가?” 따위의 학구열 넘치는 멘트로 반문하던 그가 처음으로 나에게 마음 비슷한 것을 드러내 보인 사건이었다. 어느 누가 ‘그’ 사일록이, 연락 없이 잠수를 탄 지인 애석하게도, 나의 넘쳐나는 마음과는 무관하게 우리는 아직‘썸’이라 부르기에도 모호한 사이다 에게 그런 식으로 불만을 표현할 것이라고 예상했겠나.
오랜 공백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제법 뻔뻔하게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라는 인사를 건넸다. 그는 책에 시선을 고정하고는 그런 내 인사를 몇 번이고 무시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을 듯한 목석 같은 성격과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면 주변을 전부 무시해버리고 마는 습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때에는 조금 섭섭하긴 했지만 으레 있을 평범한 반응이라 여겼다. 그리고나서 태연을 가장하고 그의 맞은편에 건너가 앉았던 일까지는 정말이지 평이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곧 눈치채 버리고 만 것이다. 그가 책을 거꾸로 든 채 귀 끝을 발갛게 물들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일부러 찾아오지 않았던 게 아니다’라는 변명과 ‘이번에 선봉대에서 준 임무가 무척 힘들었다’따위의 말도 안 되는 과장, ‘내내 네가 너무 보고싶었다’라는 진심, ‘잘 지내고 있었던 것 같아 다행이다’하는 듣기 좋은 멘트. 딱딱히 굳은 기색이 말 하나하나에 조금씩 풀려가는 것이 느껴지니 부푼 마음이 더욱 크기를 키웠다. 좋아하는 사람의 새로운 면을 마주한 사실이 기쁘고, 무엇보다, 아…. 이런 식으로 화내는구나. 귀엽다. 마음이 뜨니 실없는 소리가 절로 흘렀다.
“그러고보니 사일록은 달에 토끼가 산다는 말을 들어본 적 있어?”
대답이 없어도 어떤 말을 흥미롭게 듣는지, 어떤 말을 흘리는지 정도는 쉽게 가늠할 수 있다. 토끼에 대한 것은 명백히 전자였다. 남의 흥미를 건드리고 만 이야기꾼의 도리로, 말재간을 전부 끌어 모아 달에서 사는 토끼의 생김새며 습성이며, 떡을 짓는다는 전승까지를 전부 털어낸 뒤 언젠간 달에 함께 가서 토끼도 보고 하루 종일 함께 달 위를 돌아다니자는 확약까지 받아낸 것이 바로 지난주였다.



“…이야기한 것과 다르지 않나.”
“에이, 잘 봐. 여기가 하얗고. 빨간… 눈이고. 토끼잖아.”
…기념품용 토끼로봇 동상을 본 사일록의 반응은 건조했지만, 나름 귀여웠다.



비록 달에 복슬복슬한 귀여운 토끼도 없었고, 데이트라기 보다는 또 다른 임무 하나를 해낸 기분이긴 했지만 단 둘이서 보낸 시간은 제법 즐거웠다. 기세를 몰아 밤까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어떻냐고 물으니 그렇게 이 순진하고 무뚝뚝한 워록은 ‘같이 밤을 보내자’는 소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내 곁에 눕기까지 했다. 긴장감 비스무리한 것조차 없이 머리를 대고 누우니 이내 구름을 품에 끌어 담는 소리를 내던 모습을 되새긴다. 귀엽기는. 창가에서 달빛이 내려 푸른 뺨에 닿는다. 흐르는 윤을 따라 시선을 올리면 숨을 내뱉느라 작게 트인 입술이 반절 어둠에 잠겨 있다. 왼쪽 콧날과 감긴 눈두덩이가 투명하게 빛나는 모습을 기쁜 마음으로 한참을 구경한다.
평안하고 고요한 한밤중. 동화 같은 분위기 속에서도 먼저 품은 흑심은 꺼질 줄 모른다. 몰래 입맞출까, 잠깐고민만 하다 곧 관뒀다. 깨어 있을 때에나 즐거운 반응을 내어줄 것을 안다. 대신 침대머리에 등을 대고 앉던 자세를 고쳐 이불 속으로 몸을 눕힌다. 방향은 수면의 정석을 그려낸 듯 누워 있는 동침자를 향했다. 저 수려한 미모를 잠들기 직전이래도 놓칠 수야 없다. 그런 마음을 무거운 눈꺼풀이 열렬히 배신해댄다. 곁이 무겁고 따끈하니 잠이 솔솔 오네. 잠결에 웅얼웅얼 인사를 건넨다. 잘 자, 사일록. 달토끼 꿈 꿔… .

 

 

 


 

행간설정이 마음에 안드는데 대체 뭘 잘못 건드린건지 모르겠어요.

앤오님이 글을 읽어주시고는 바이스에겐 안되었지만 사일록은 달토끼꿈 대신 바이스 꿈을 꾸었다고 전해주셨는데 아니그게뭐가안된일이에요오히려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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