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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3

1020대 되는 어린 애들처럼 연락에 대해 극성맞게 구는 편은 아니다. 올 때 되서 못 오고, 갈 때 되었는데 사정이 생기면 연락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않나. 잔소리가 없어도 예상치 못한 외근, 외박, 기타 등등 루틴에서 벗어나거나 두세시간 이상 연락 안될 일이 생길 때면 따박따박 연락 하시던 박정하군이 오늘은 무려 하루종일 연락이 없다. 백보 양보해서, 낮 동안은 뭐 일이 바빠서 그럴 수 있다고 쳐. 그러나 해가 떨어지고, 진즉 집에 와서 눈 앞에 알짱거려야 할 사람이 눈 앞에 없는데 연락까지 없다. 전화까지 바라는건 당연히 아니다. 문자 한 통은 해야할 거 아냐 . . . 갑자기 던전 브레이크를 막으러 갔다던가, 갑자기 높은 사람이랑 회식이 생길 때에는 몇 번 이런 적이 있긴 했다. 하지만 전자는 적어도 뉴스를 통해 대충 예상이라도 하고, 후자는, 뭐, 자기보다 높은 사람이 대체 얼마나 있다고 수선인가. 그리고 내가 걔보다 안무서워? 황당하네.

모든 것이 끝나고, 모습과 정체를 감추고 나니 딱히 별 할 일이 없어진 이서는 이런 불합리하고 막무가내인 태도로 남편을 쪼거나 글을 쓰며 자신의 머리를 쪼거나 하며 평화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가 지난 날을 완전히 잊은 것은 아니었다. 불평불만, 유치한 투덜거림에 불안이 스민다. 연락이 안될 정도로 갑작스럽고 거대한 일이 닥쳐온거라면? 불꺼진 방 의자에 앉아 다리만 달달거리던 그는 생각을 길게 하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코트가 어딨더라. 검은색 옷은 오랜만인데….

충동에 불을 붙였던 비이성적인 불안은 정하가 근무하는 군영이 가까워지며 가라앉는다. 포장되지 않은 흙길에 최근에 찍힌 전차의 바큇자국은 없었고, 풀벌레와 산짐승도 각자의 자리에서 평화로운 소리를 냈다. 멀리서 큰 소란이나 불안이 느껴지지도 않고. 별 일은 없겠구나. 그러나 여기까지 온 이상 삔또가 상할 때까지 연락 않고 직장에 뭉겐 남편을 꼭 데리고 집에 돌아 가야겠는 다짐이 선다. 가만두지 않겠어. 사람이 오갈 수가 없는 시간에 검은 인영이 아른거리자 자연스레 경계 태세를 비추는 가여운 당직 근무자들에게 다짜고짜 한마디를 던진다.


" 야, 다 비켜. 너네 나 몰라?와, 참나... . 책임자 불러와. 아니, 내가 직접 간다."

*

이렇게 나는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 내 남편의 신변을 인계받는다. 다소 간의 진상 짓을 통해 자잘한 피해가 있었으나, 어쨌든 전부 박정하 탓이므로 걔에게 청구하길 바란다. /1215




아르샤는 책을 읽다보면 곧잘 잠들었다. 그렇게 잠들면 중간에 불안한 듯 잠에서 깨는 일도 거의 없었다. 책 사이에 있으면 안정을 찾는 것 같았다. 그걸 눈치챈 다음 날부터 바로 서고를 꾸리기 시작했다. 집안 곳곳 손이 닿을만한 곳에도 자잘하게 책장 선반을 설치했더니, 이곳저곳에서 책을 보다 이렇게 잠들어 있는 일이 늘어났다. 조슈아는 가만히 잠들어 작은 숨소리만 내는 아르샤를 내려다보며,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난 아르샤의 표정을 잠시 회상했다. 아주 잠깐의 회상 후, 그때보다 훨씬 생기가 도는 따뜻한 뺨, 내려앉은 속눈썹, 편안하게 풀린 얼굴을 시선으로 몇번이고 쓰다듬는다. 악몽같던 시간은 늘 그렇듯 언젠간 지나가고, 사랑과 함께 그 끝은 평화로웠다는 옛날 이야기. 아주 어려 무엇도 잘 모를 때에도 냉소하던 동화는 이렇게 아르샤의 것이 되어 있었다.  

편안하게 잠든 이가 주는 안온함에 젖어,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아르샤를 바라보던 자세 그대로-소파 앞에 대충 기대 앉은 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고요한 방에 열린 창을 통해 나뭇잎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건너온다. 서재 안의 작은 난로에서는 불이 일렁이고, 멀리 숲에서는 소쩍새와 귀뚜라미가 낮게 울었다. 

야옹.

고양이가 불만스러운 듯 조슈아의 무릎에 투다닥 주먹을 날린다. 깜짝 놀라 깬 그는 정신 없는 와중에도 반사적으로 고양이 턱을 살살 긁는다. 고양이는 꼬리를 바닥에 소리나게 부딪혀대며 계속해서 종알거린다. 화답하듯 "아이고, 조용히 해. 엄마 자잖아.." 중얼거린 조슈아는 뒤늦게 정신을 차린다. 도착하자마자 겉옷도 벗지 않고 잠들 뻔했다. 그리고 아르샤를 찾으며 대충 훑어봤던 주방이 지나치게 깨끗했다. 아르샤도 퇴근하자마자 바로 여기로 온 것이 틀림 없었다. 아무것도 먹지 않았겠지. 고양이도 마찬가지겠고…. 잔뜩 화난 와중에도 사람 손길이 좋아 발랑 누운 고양이의 배털을 자연스레 헤집으면서도 조슈아는 남는 손으로 품에서 완드를 꺼내 가볍게 흔들었다. 

찬바람이 들어오던 창문이 닫히고 커튼이 창을 가린다. 그와 거의 동시에, 촛불이 몇몇 더 켜지며 방 안이 눈이 살짝 밝아졌다. 눈이 부시지 않도록 섬세하게 조절된 조도. 멀리 주방에서는 후라이팬과 빵 봉지가 달그락,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시작된다. 가볍게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코트를 벗은 조슈아는 그제서야 비스듬히 앉은 아르샤의 옆에 앉는다. 품을 가깝게 붙이며 자연스레 그를 가볍게 끌어안으니 어르고 달래는 모양새가 된다. 한참 바라보던 뺨에 은근슬쩍 입술을 스친 조슈아가 가만히 중얼거린다. 

"아르샤, 저녁 먹고 자자. 일어나."  /1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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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칵.

[..렇게 마음대로 만져도 되는거에요?]

부스럭바스락덜컥, 콱, 달그락, 따닥, 빡! 달칵 또각 바스락.. 그리고 무언가 버튼이 잘못 눌리며 녹음된 전자음.

[응?보이는 데에 나와 있는거니까 상관 없지 않을까? 기왕 내 얘길 해준거니까 답장을 하고 싶어서…. 잠깐, 이거 된건가?]

당황한 엑소 개체가 내는 침음. 바스락 턱, 서석, 사각바삭. 

[어디 망가진거 아니겠지? 동글아, 좀 봐 줘.]

고스트의 스캔 소리. 마이크가 막혔는지, 고스트가 부산스럽게 의체를 돌려가며 하는 잔소리가 멀리 있는 듯 먹먹하게 녹음 되어 알아듣기 힘들다. 부스럭거리며 다시 소리가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다시 조작음, 다각, 달칵, 파각. 둔탁한 소리가 지난 뒤 천 스치는 소리까지 나고서야 조용해진다. 

[어, 음. 그러니까. 드래그? 이거 내 얘기 맞지…?]

[이제와서 그런 소리에요?기왕 이렇게 된거 팍팍 밀고 나가요.]

당황한 듯한 엑소 기계음. 고스트 렌즈가 좁아지는 소리. 의체 돌아가는 소리. 크흠, 하고 엑소가 사람의 헛기침을 흉내내는 소리.

[ …알았어. 일단, 그게, 음.. 평소에도 이렇게 차분하게 이야기해주면 좀 좋을 것 같네…. 최고…라는건 좀 부담스럽지만…. 결국 나 좋다는거지? 고마워.]

[이런 이야기는 좀 더 평범한 말투로 나한테 직접 해주면 좋겠는데. 넌 되게 이상한 데에서 낯을 가리더라.]

다시 헛기침하고. 

[하고싶다는게 뭔진 모르겠지만, 최대한 어울려줄게. 나 시간 많아. 음…. 선봉대에서 부를 때 빼고.]

[내면이라. 우리가 같이 다니는건 내 성격 때문이라기보단….]

[네가 계속 날 찾아주기 때문…. 도 있고. 이런 이야기는 좀 부끄럽지만, 나도 이젠 네가 없으면 좀 허전하거든.]

[네가 가끔… (가끔이라뇨. 거의 항상 그런다구요, 그 워록은!) 아, 아잇 동글아….]

마이크에서 조금 멀어져 고스트와 엑소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고스트의 일방적인 잔소리..? 하여튼 그런 소리가 난다. 정확히 알아듣기는 힘든 대화.

[어쨌든. 네가 가끔 과하게 구는거만 빼면 나도 너랑 어울리는 게 재밌어. 그러니까 앞으론 제발 좀 진정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찾아와주지 않을래…. 기왕이면 오기 전에 연락도 좀 미리 주고….]

제발…. 이라고 덧붙이는 소리 뒤에 고스트의 불만스러운 중얼거림과 부지런히 의체를 돌리는 소리가 난다. 

*

두 번째 테이프. 앞선 녹음보단 수선떠는 소리가 비교적 적게 들린다. 달칵달칵덜그럭, 따각,

[나 실수로 네 녹음에 덮어쓴 것 같아. 미안, 이렇게 생긴 기계는 처음 다뤄봐서…. 근데 이거 나 들어도 되니까 꺼내놓은거 맞지?]

[아아아마 아닐걸요….]

[뭐? 그 소릴 왜 이제야─]

달칵. 
녹음은 여기서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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