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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G OC/.ssul

0519, 이제는 다 지난 이야기

"너는 닐 이해하잖아." 

시작은 그 한 마디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내가 헌터를 잃고 워록과의 사이가 묘연해졌을 때 만난 이였다. 그 또한 함께한 사람들을 잃는 것에 지친 사람이었다. 처지가 비슷해 말을 주고받다보니 마음이 맞았고, 마음이 맞다보니 서로를 꽤 자주 찾아 또 말을 주고받게 되고... . 우습게도 그 몇 번의 대화로 힘들 때를 함께 견디며 이겨낼 친구가 생긴 줄로 착각했었다. 그 날 저녁에도 평범하게 연락이 왔다. 술 한 잔 하자는걸 거절하길래, 산책을 하듯이 도시의 외곽을 돌며 이야기를 나눴다. 조금 궂은 날씨였지만, 그런 기분이었기 때문에 비를 맞으며 나란히 걸었다. 시시콜콜하게 근황 얘기를 떠들다보니 미묘하게 혼자 이야기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서 무슨 일 있냐고 물으려던 때에, 그가 나의 말을 끊고는 웃으며 있잖아, 내 고스트 좀 쏴주라, 이젠 진짜 힘들어서 안되겠어. 그랬었다.

그걸 거절했어야 했는데. 나는 감히 그를 위로하지도, 그에게 화를 내지도 못하고 가만히 허리춤에 차고 있던 핸드캐논을 꺼내들어 안전장치를 풀었었다. 그런 절망에 빠진 사람을 위로할 수도, 화를 낼 수도, 의지를 불어넣어줄 수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잃은 우리에게 필요한 말을 해 줄 수 있는건 이미 떠나가버린 그 사람들 뿐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 고스트가 어떤 의체를 입고 있었는지, 죽기 전에 어떤 이야기를 했었는지는 이제 기억 나지 않는다. 겨우 떠오르는 것은 귓전에 새겨진 총성과 빗소리, 그리고 뒤이어 따라온 한숨같은 웃음과 피냄새 뿐이다. 나는 고스트만 쐈는데. 아니, 뒤이어 그도 쏴주었던가? 모르겠다. 숨도 쉬지 못하고 쓰러진 그가 서 있어야 했을 자리만을 바라보고 있다가 산짐승이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땅을 파서 시체를 묻고, 부서져 조각난 고스트를 주워 도망쳤다. 없는 정신으로 집에 겨우 돌아와 고스트 조각을 숨기고, 샤워를 세 번 쯤 했을 때 스스로가 떨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었다. 그 때 울었었나? 그것까진 기억나지 않는다.

워록이 죽은건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이다. 고요하던 통신 단말이 갑자기 크게 울려 화들짝 놀라 확인해보니 워록에게서부터 메세지가 온 것이었다. 헌터가 죽은 뒤로 한참 연락하지 않았었는데. 하필이면 그 날에도 비가 오고 있었고, 문자의 내용도 오랜만에 나누는 이야기 치고는 지나치게 평범했다. 서늘하고 불길한 기운이 척추를 타고 기어올라왔지만 애써 무시하고 그를 만나러 도시의 외곽으로 향했다. 우산은 챙기지 않았다. 약속 장소에서 마주친 그는 조금 수척해진 얼굴로 웃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했더라. 무슨 말을 했었지. 필사적으로 긍정적인 이야기를 꺼내놓는 나를 향헤 작게 웃으며 그가 부탁할게. 하더니, 검고 작은 메모리칩과 자신의 고스트를 내 손에 쥐어줬었다. 비 때문에 싸늘해진 날씨 탓인지 차가웠던 그의 손. 움직이지 않는 차가운 고스트. 얼어붙은 숨과 무슨 뜻이냐고 되물을 수도 없이 선명한 그의 태도.

"죽지 마..."
"... ."
"제발... ."

수풀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그의 뒷통수에 겨우 말을 던져냈다. 그러나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비틀비틀 걸어갔다. 왜? 왜 그렇게 죽으려고? 너는 괜찮은거 아니었어? ... . 멍청하게 따라가지도 못하고 울면서 그의 뒷모습만 바라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희미하게 총성이 들렸다. 확인하러 갈 용기는 없었다. 손에 올라와 있는 워록의 고스트와 메모리칩만 한참 쳐다보다가 내가 해야할 일을 했다. 그렇게 숨겨둔 상자에 부서진 고스트 코어가 늘었다. 이제 뭘 어떻게 해야하지? 내가 무슨 짓을 한거지? ... . 고민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눈을 감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전신이 비에 젖은 것 마냥 축축해졌다. 잠에 들 수 없어 워록이 마지막으로 건넨 메모리 칩에 담긴 우리의 모습만 밤새워 반복해 들여다보곤 했다. 

그가 찾아온 건 워록의 시체가 발견된 뒤였다. 선봉대 소속으로, 수호자 간의 분쟁이 있다면 그를 끝까지 조사해 사실관계를 면밀히 밝혀내기로 유명한 성정. 내 화력팀의 그들과 나보다 더 오래 알고 지냈던 또 다른 워록. 그의 장례식장에서 딱봐도 언짢은 기색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나를 시야에 담자마자 그 자리에서 당장 나를 찢어죽일 수 있을 것 같은 서늘한 기색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네가 죽인거지?"
"... ."

그는 대꾸하지 못하고 얼어 있는 나를 향해 조용하고 날카로운 말들을 쏟아냈다. 쓰레기. 웃고 떠들었던 시간동안 뒤통수를 칠 생각 뿐이었던거지? 태도가 비뚜름했을 때부터 눈치챘었어야했는데.... 그가 꺼낸 그 어떤 말도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지만 그 말이 담고 있는 경멸과 혐오는 뼈 속 깊이 스몄다. 어떻게 안거지? 봤나?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거지? ... 식은 땀만 흘리다가 다신 눈에 띄지 말란 얘기에 겨우 고개만 끄덕이고 도망쳤다. 뒤늦게 죽은 이들에 대한 죄책감보다 내 안위를 먼저 걱정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스로가 혐오스러웠다. 나는 살인자고, 죄인이었고, 곁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게 혼자 남아 내리지도 않는 빗소리에 시달렸다. 그 때 즈음 해서는 이모탈리아가 없으면 생활하기 어려웠다. 

죽어버려야하나. 그런 생각을 할 때 쯤엔 멍하니 지내다 발작적으로 찾아오는 환청이나 가슴에서 느껴지는 강한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머리에 총을 쏴갈겨대는게 일상이었다. 그러고 난 뒤 깨어나면 일주일이 지나있었다. 세바스찬의 배려였는데, 그것도 한참 반복되니 여러모로 한계에 부딪히고 만 것이다. 조용히 죽기 위해 도시의 외곽으로 나가는데, 곁을 스친 누군가가 워록의 죽음을 비웃는 소리를 들었다. 그 웃음을 듣는 순간 그를 죽여야만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고, 사람이 가득 있는 격납고에서 바로 총을 빼들지 않기 위해 화를 억누르며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이제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그는 워록과는 연관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고, 성품이 부드러워 타인의 비극을 비웃을 만한 이는 아니었는데. 그 때는 그런 웃음을 들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를 죽이기 위해 꽤 오랜 시간을 계획했다. 언제 임무를 나가는지, 무슨 업무를 주로 하는지, 누구와 관계되어 있는지... . 그에게 접근해 얼굴을 익히고, 꽤 오랜 시간을 그와 함께 웃고 떠들며 죽이기 가장 좋은 타이밍을 노렸다. 나와 같은 절망감을 느꼈으면 해서, 그를 죽이기 전에 그에게 있어 소중한 사람들을 먼저 죽였다. 그 때는 서툴렀기 때문에 목격자가 있었는데, 뭐, 그들도 죽였다. 모든 죽음의 순간에 망설임은 없었다. 마침내 계획한 바를 전부 이루었을 때에는 오래 미뤘던 숙제를 해결한 듯 가벼운 걸음걸이와 산뜻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갔다. 살해를 계획할 때엔 은신처에서만 숙식을 해결했었기 때문에 푹신한 침대가 그리웠었지. 개운하게 몸을 씻고 난 뒤, 처음 고스트 조각을 숨겼던 곳에 새로운 조각들을 구겨넣고는 곧장 단잠에 빠져들었다. 오랜만에 악몽이 없는 잠이었다. 

그 날을 기점으로 무언가에 홀린 듯이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웃는게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필요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워록과도 계속해서 마주쳤지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웃으니 질린 낯으로 되려 그가 나를 피했다. 앞으로는 멀쩡한 척 굴며 뒤로는 헌터의 흔적을 되짚었다. 누가 그 일을 소개해준건지. 왜 그런 일을 하게 됐는지. 그러면서 어떤 사람을 만났고 무슨 일을 해온건지... . 헌터와 함께 떠났으나 살아 돌아온 사람, 헌터에게 그 일을 소개시켜준 사람, 소개시켜준 사람의 주변 사람, 헌터를 부추긴 사람들... . 하나둘씩 찾아 죽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불행해졌으면 좋겠어서 그랬어. 누군가를 죽이고 난 뒤 뻔뻔스레 그의 장례까지 치러주며 주변인을 위로해준 적도 있었고, 주변의 소중한 사람을 먼저 죽여버린 뒤에 혼자 남게 된 그를 살살 달래어 혼을 빼놓은 뒤 먼저 간 이들의 곁으로 보내주는 것으로 마음을 풀 때도 있었다. 주머니에는 늘 부서진 고스트의 의체나 어그러진 코어가 들어있었고, 습관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어 파편으로 손장난을 치며 어느 새 우리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 추억이 끼어들 틈 따윈 없었다. 늘 다음을 대비해야했기 때문에. 마음을 진창에 처박아둔 채로 매일 세상을 저주하고, 사람을 죽였다.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죽어 마땅한 것을 다루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렇게 아무런 망설임도, 죄책감도 없이 행동해왔는데 빗소리와 악몽은 떠나갈 줄을 몰랐다. 이유를 모르겠어. 잃어버린 사람들은 진작 잊었고, 상실의 원인을 제공했던 모든 것을 내 손으로 전부 잘라냈는데. 처음 그랬던 것처럼 후련해서, 이제는 이 질척거리고, 무엇인지 알 수 없고 쓸모도 없는 이 감정들에게서 벗어나 편히 쉴 수 있어야 하는데. 하지만 너와 부딪히게 되며 모든 것은 잊혀진 것이 아닌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었단 것을 깨닫고 말았다. 아닌 척 묻어뒀던 모든 것이 너로 인해 낱낱히 파헤쳐 졌다. 알 수 없다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 죄책감이었고, 후회였고, 슬픔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저질러 온 일들의 무게감이 느껴진다. 무의식적으로 막아두었던 강렬한 감정들이 휘몰아쳐 내게 다가온다. 지난 날들을 다시금 떠올리고 만다. 헌터의 목소리가 어땠었지. 워록은 어떻게 웃었더라. 우린 무슨 이야기를 했었지. 나는 그들이 죽고나서 왜 이렇게 된거지.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 자꾸 발목을 잡고 마음을 울린다. 얄팍한 합리화로 덮어두었던 모든 것을 네가 하나하나 들춰내며 나를 무너뜨린다. 

너를 대체 왜 사랑하게 된거지, 라니. 그 말은 틀렸어. 어떻게 이제서야 사랑을 깨닫고 만거지. 나는 처음부터 너같은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던건데. 통제할 수 없는 것들에게 휘둘리고, 스스로를 제어하지도 못한 채 알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나에게 끝을 줄 사람을. 나는 늘 이렇게 이기적인 태도로 누군가를 필요로 해왔기 때문에 전부 잃어온거겠지. 이제 내게 남은 것은 나의 목숨 뿐이고, 나를 온통 들쑤셔둔 네가 나에게 유일하게 남은 이것을 거둬가주었으면 해서. 계속해서 너를 자극하며 내가 원하는대로 움직여주기를 바란다. 나를 죽여, 제발.

..그런 심중을 정확히 꿰는 말에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 뭐. 그냥 모르는 척 눈 딱 감고 날 죽이면 안돼? 나를 대체 왜 살려두는거야. 내가 거슬리잖아. 치워버리고 싶잖아. 내가 없어지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있잖아... . 네 화력팀원을 정말로 죽여 없애면 그 때는 나를 죽여주지 않을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너에게 진심으로 미움받고 싶진 않아서. 게다가 너는 나와 같지 않아서 화력팀원이 죽는다 해도 나를 죽이지 않을지도 몰라. 복잡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결국 실천하지 못했다. 어린애가 떼를 쓰는 것도 이보다 유치하지는 않을거란 자조를 익숙한 태도로 외면한다. 말이 안통한다고 짧게 중얼거리고는 -말이 안통하는 상대는 네가 아니고 나임을 아는데도 뻔뻔스럽게 그런 말이 잘도 흘러나왔다.- 주머니에 넣어둔 잭나이프를 빠르게 꺼내들어 네 허벅지에 꽂아넣는다. 혈향이 찌꺼기처럼 남은 증오와 울분, 팔을 에워싼 통증을 자극한다. 그 욱신거림을 발판 삼아 싸워야한다, 눈 앞의 녀석에 대해 가진 감정은 증오와 역겨움 뿐이다. 그런 식으로 거짓을... .   


감정선이 이해할만큼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구구절절하고싶은 마음과 불행 팔아먹는게 싫어서 대충 쳐내고 말아버리고 싶은 맘이 자꾸 부딪혀서 힘들었다네요 (기타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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